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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프리다,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by me_re_log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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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2003

 

비둘기와 코끼리의 만남, 프리다와 디에고


영화 프리다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인 프리다 칼로의 삶과 예술세계를 다룬 전기영화입니다. 열여덟이라는 어린 나이에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된 프리다. 본래 의사가 되길 꿈꿨던 프리다는 사고를 겪으며 오랜 시간 동안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평가받기 위해 당대 멕시코의 국민화가로 널리 알려진 디에고 리베라를 찾아갑니다. 이후 연인관계로 발전한 둘은 주위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리다의 나이 21세 때 43세의 디에고와 결혼식을 올립니다. 디에고는 이미 두 번의 결혼을 통해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프리다의 어머니는 그 둘의 결혼을 일컬어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지요. 결혼 후 프리다는 자신의 작품활동은 내려놓고 전적으로 디에고를 도왔으며, 그가 좋아하는 테오아나족의 전통 의상을 착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프리다는 디에고의 아기를 갖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사고로 인해 임신을 할수 없는 몸이었던 탓에 연이은 두 번의 유산으로 크나큰 상실감에 빠집니다. 슬픔에 젖어 있는 아내에게 디에고는 그림도구를 건넸고, 프리다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육체적, 정신적 수렁에 빠져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디에고의 바람기는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심지어 프리다의 동생과 불륜을 저지르기도 하였으며, 그것을 알게 된 프리다 역시 외도행각을 벌이기 시작하죠. 그러던 중 디에고는 프리다에게 트로츠키의 망명을 도와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에 프리다는 자신의 친정집에 트로츠키 부부를 머물게 합니다. 프리다의 작품에 매료된 트로츠키는 프리다와 관계를 맺고 이것을 알게 된 트로츠키의 부인이 그를 독촉하여 서둘러 프리다의 집을 떠납니다. 트로츠키가 급작스레 떠나버린 영문을 모르는 디에고에게 프리다는 사실을 실토합니다. 그렇게 디에고와 프리다의 관계는 다시 멀어지지만 프리다의 작품들은 점차 유명세를 타면서 프리다는 유럽을 오가며 전시회를 열죠. 프리다는 디에고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디에고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런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이혼을 통보합니다. 디에고와 헤어진 후 프리다의 건강은 더욱 나빠지면서 발가락이 썩고 보조기구에 몸을 지탱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프리다는 신체의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갑니다. 1년의 시간이 지난 후 디에고는 다시 프리다를 찾아오고 둘은 재결합을 합니다. 프리다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한 디에고는 프리다의 곁에서 그녀의 작품세계를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죠. 그녀의 생애 마지막 전시회에서는 몸을 움직일 수 조차 없어 누워있는 침대를 그대로 옮겨서 전시회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상을 떠나기 불과 8일 전, 그녀는 'Viva La Vida(인생이여, 만세!)'라는 문구가 새겨진 수박을 그린 정물화 한 점을 완성합니다. 프리다 칼로의 일기장에 남겨진 그녀의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내 마지막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합니다.

 

멕시코의 지폐에 새겨진 두 화가


프리다 칼로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병상에 누워 독학으로 그림실력을 연마했고, 주로 개인적인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와 자화상을 즐겨 그렸습니다. 이를 통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던 삶을 향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지요. 또한 자신의 뿌리인 모국 멕시코에 강한 애착을 가졌던 프리다는 줄곧 전통의상을 착용했으며 그림에도 이를 적극 반영하였습니다. 전통을 향한 애착은 남편 디에고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도 있지만, 그녀 스스로도 멕시코 고유의 문양과 형식에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디에고 리베라는 당대 멕시코의 국민화가로 널리 알려졌으며, 혁명적 색채를 지닌 민중벽화의 거장이었습니다. 사회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 국민의 정신을 일깨워 과거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고 문화적, 정치적으로 계몽을 도모하는 내용을 담은 벽화를 주로 제작했습니다. 멕시코 토속문화에 대한 애착도 이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프리다 역시 디에고와 동일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으나, 주로 개인사를 담은 작품세계를 전개했던 생전에는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정도로 알려졌었지요. 그러나 유럽에서는 디에고 리베라보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이 더욱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인생에 일어난 커다란 두가지 사건은 바로 교통사고와 디에고 리베라를 만난 것이며, 디에고를 만난 것이 교통사고보다 더 나빴다는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그만큼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 칼로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안겨준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다에게 있어 디에고 리베라는 단순히 배우자를 떠나 스승이자 예술적 동지, 아버지이기도 하고 심지어 아이가 없었던 그녀에게는 자식과도 같은 존재로서 자기 자신보다 더욱 사랑했던 대상이었습니다.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그리고 혁명가가 되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지요. 그녀의 염원을 담은 것인지, 멕시코 500페소 지폐의 앞 뒷면에는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가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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